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정보력 === [[설장수]](偰長壽)의 상소문 등에서 보자면, 왜구는 미리 정보를 얻어 부유한 사람이 있는 곳, 양식이 많은 곳, 조운선을 약탈해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때문에 [[청야작전]]은 전혀 소용이 없었으며, 고려인으로 위장해 고려군을 유인한다든가, 고려군의 군영을 피해 일반 백성을 친다든가, 역으로 고려 백성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돌파하여 고려군의 군영을 먼저 치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해적들이 떠올릴 만한 발상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외국의 행정이나 언어를 분석할 만큼의 교육이 뒷받침된 세력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왜구들이 붙잡은 고려인을 통해서 정보를 얻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실제로 고려 말의 정치인이자 시인인 [[이색(고려)|이색]]은 그의 시집인 [[목은집]]에서 왜구들에게 붙잡힌 고려 귀족의 자제들이 그들한테 정보를 알려주며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해 개돼지보다 못한 짓이라고 무척이나 분개했으나, 그러한 일들은 왜구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또한 왜구들 중에는 고려와 가까운 대마도 출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고려의 언어와 사정에 능숙하여 왜구들의 길잡이 노릇도 하였다. 아울러 고려사 권제 41 공민왕 18년 기사에 의하면 "거제와 남해현에 있는 투화(귀화)한 왜인들이 배반해 자기 나라(일본)로 돌아갔다. 왜인들이 거제도에 살면서 영원히 화친관계를 맺고자 하므로 조정에서 그것을 믿고 허락하였었는데, 이 때에 와서 도적이 되어 침입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서, 고려에 거짓으로 귀순하여 살던 일본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달아나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쳐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비록 일본인이지만, 고려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니 고려의 지리나 내정에 대해 비교적 잘 알았을 것이고, 그러니 왜구들이 고려를 침입할 때, 아주 유용한 안내원이자 정보원 역할을 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